사회주의제도가 꽃피운 아름다운 이야기
보답의 마음 안고
동대원구역 신리동에 사는 리명철동무를 두고 사람들은 영예군인작가라고 정담아 부르고있다.하다면 무엇이 평범한 영예군인에게 이렇듯 놀라운 열정과 투지를 안겨준것인가.
군사임무수행중 뜻하지 않게 부상을 당한 그에게 있어서 제일 괴로운것은 나라에 아무런 보탬도 줄수 없는 존재로 되였다는 좌절감이였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그가 영예군인공장에서 혁명의 꽃을 계속 피울수 있도록 해주었고 보약재와 보조금도 안겨주며 세심히 보살펴주었다.그뿐이 아니였다.
의료일군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친혈육이 되여 그의 건강을 따뜻이 돌봐주었다.
하여 그는 언제부터인가 이처럼 고마운 품을 노래하고싶은 마음속충동을 누를길 없어 글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첫 작품이 나왔을 때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주었던가.얼마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일군까지 찾아와 재능을 활짝 꽃피우도록 많은 방조를 주었다.
그후 그는 더 많은 글작품을 창작하였고 나라의 은덕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마음으로 대건설장들에 나가 자기가 지은 시를 읊으며 경제선동활동도 벌리였던것이다.
그는 오늘도 작품창작에 지혜와 열정을 다 바치고있다.
영예군인들을 나라의 귀중한 보배로 떠받들어주고 진정을 다해 위해주는 사회주의 우리 제도의 고마움에 대한 보답의 마음 안고.
집단의 뜨거운 사랑과 정속에
얼마전 황해북도농촌경리위원회 황주젖소목장 종업원 민철남동무는 수십일간의 입원치료를 마치고 완쾌된 몸으로 집에 들어섰다.아들을 반갑게 맞이한 그의 어머니는 이윽고 이렇게 말하였다.
《네가 입원해있는 기간 목장일군들이 찾아왔댔다.아들이 없이 늙은이들끼리 사느라 불편한 점이 없는가를 알아보고는 부식물과 땔감을 해결해주더구나.》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 뜨거운것이 맺혔다.
뜻밖의 일로 병원의 침상에 눕게 되였을 때 그는 더는 로동생활을 할수 없지 않을가 하는 걱정으로 모대기였다.그런 그에게 생의 활력을 되찾아준것은 동지들의 뜨거운 사랑이였다.목장일군들과 종업원들은 사업으로 바쁜 속에서도 자주 병원을 찾아와 의료일군들과 치료대책을 토의하였고 그가 수술을 받은 후에는 몸상태가 빨리 회복될수 있도록 보약재도 구해왔다.
그것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는데 집에까지 찾아와 부모를 돌봐주었다니 정녕 얼마나 뜨거운 집단의 사랑속에 살고있는가 하는 생각으로 그는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끝없이 울려나왔다.
(이처럼 고마운 사람들, 고마운 제도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리라.)
낯선 고장에서 10여일
얼마전 만포시에 대한 취재길을 이어가던 우리는 만포동에 사는 장성희녀성으로부터 감동깊은 이야기를 전해듣게 되였다.
《몇달전 저는 볼일이 있어 전천군에 가게 되였습니다.그곳에 도착한 저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낯선 고장인것으로 하여 걱정이 많았습니다.설상가상으로 길을 가던 저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길가에 쓰러졌습니다.
얼마후 눈을 뜨니 뜻밖에도 전천군안전부 안전원동지들이 걱정어린 눈길로 저를 내려다보는것이였습니다.그들이 나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왔던것입니다.
이윽고 몸상태가 괜찮은가 등을 세세히 알아보던 그들은 저에게 전천군이 처음이라는것을 알고는 자기들과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이 곁에서 돌봐주어야 마음을 놓겠다는것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병원을 나선 저는 그들이 이끄는 숙소로 가게 되였고 외지생활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보장받게 되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들은 매일 아침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밤새 불편한 점이 없었는가를 알아보고는 필요한 대책도 세워주군 하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전천군에 머무른 10여일간 아무런 불편이나 외로움을 모르고 생활하였습니다.》
만포시의 한 녀인이 들려준 이야기, 여기에는 사회성원모두가 서로 돕고 이끌며 사는 우리 사회의 참모습이 그대로 비껴있다.
글 및 사진 박춘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