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수령님 한평생 걸으신 포전길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넘쳐나는 4월의 하늘가로 노래가 울려퍼진다.
못잊을 그리움에 포전길 걸을 때면
가슴에 안겨오는 수령님 그 모습
봄명절 그날에도 우리를 찾아오시여
농사이야기 나눠주시던 그 모습 그립습니다
…
새길수록 나라의 농사일을 두고 그토록 마음쓰시며 포전길을 걷고걸으신 우리 수령님의 헌신의 자욱자욱이 뜨겁게 어려와 눈시울이 젖어든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김일성동지의 한생은 이민위천을 좌우명으로 삼고 사상과 령도에 구현하여 현실로 꽃피우신 인민적수령의 숭고한 한생이였다.》
우리 숭엄한 마음으로 강서구역 청산농장에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동상을 삼가 우러른다.
청산벌이 환해지도록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짓고계시는 위대한 수령님,
우러를수록 우리 수령님께서 한평생 걷고걸으신 험한 포전길들이 어려와 격정을 금할수가 없다.
해방조국의 첫 기슭에서부터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까지 근 50년세월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농장벌을 찾고 또 찾으시였다.
잊을수 없는 1947년 6월 7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미림벌에 나오시여 친히 모내기를 하시였다.
얼마나 그리던 김일성장군님이신가.그분께서 모내기를 하러 나오시다니.
위대한 수령님께서 미림벌에 도착하시자 그이를 우러러 농민들이 터치는 환호성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환호하는 군중에게 답례를 보내시며 솔문앞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분여받은 땅에 모두 즐겁게 모를 내자고 말씀하시였다.그러시고는 모춤을 쥐시며 당장 써레친 논판으로 들어가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나오신다기에 일정한 격식의 시앙식이 있을줄로만 알고있던 일군들은 너무도 뜻밖이여서 어쩔바를 몰랐다.이때 수염발이 허연 로인이 황급히 그이께 달려가 만류해드렸다.
《장군님, 이 무슨 일이옵니까.나라의 임금님이 모춤을 쥐시다니… 장군님, 부디 저기에 앉아 우리 농군들이 모꽂는걸 보아주시길 바라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인의 터갈린 손을 쓸어만지시며 할아버지, 저는 나라의 임금이 아니라 인민을 위해 심부름을 하는 사람입니다라고 하시며 오늘은 할아버지가 저기에 앉아서 우리 젊은이들이 모꽂는 모습을 구경하라고 이르시였다.
이윽고 논판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모춤을 물에 깨끗이 씻고 뿌리를 가쯘하게 맞추신 다음 논판에 첫모를 꽂으시였다.
간고한 항일혈전의 길을 헤치시여 피로써 찾은 조국땅에서 모내기를 하시며 우리 수령님께서 그려보신것은 무엇이였던가.
인민이 주인된 이 땅에 세세년년 오곡백과 무르익는 아름다운 화폭이 아니였던가.
지금도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일력을 번지느라면 한해동안 몇차례씩 찾으신 농장의 이야기며 명절날, 휴식일에도 험한 포전길을 걸으신 감동어린 사연들이 되새겨진다.
우리 수령님은 온 나라 대가정의 자애로운 어버이이시였다.천만자식을 한품에 안으신 우리 수령님께서는 걱정도 많으시였다.해야 할 일도 많으시였다.그중에서도 제일 마음쓰신것은 우리 인민모두에게 가장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안겨주는것이였다.그래서 우리 수령님께서 현지지도의 자욱도 농업부문에 제일 많이 남기시였다.
서해기슭의 온천군을 찾으면 이 고장 사람들이 감격에 겨워 들려주는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1960년 6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간석지개간정형을 료해하시기 위하여 온천군에 대한 현지지도를 진행하시였다.
간석지로 들어가는 길어구에 차를 세우시고 내리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헤쳐 간석지가 시작되는 뚝에 올라서시였다.
끝없이 펼쳐진 간석지벌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좀더 나가보자고 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당혹감을 금할수 없었다.
일군들이 이 앞으로는 나가실수 없다고, 이제 더는 길이 없다고 아뢰이며 막아나섰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였다.
《괜찮소.더 나가봅시다.인민을 위한 길인데 무엇을 가리겠습니까.길이 없으면 우리가 이 간석지에 첫길을 냅시다.》
그러시고는 감탕판으로 성큼 걸음을 내짚으시였다.
걸음을 옮기실 때마다 시꺼먼 감탕물이 사정없이 튀여오르건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좋구만, 얼마나 많은 땅이요.》라고 말씀하시며 걷고 또 걸으시였다.
얼마후 진펄 한가운데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벌을 개간하면 참 좋겠다고, 전망이 아주 풍부하다고 기쁨에 넘쳐 말씀하시였다.
이런 감동깊은 사실이 어찌 서해안의 간석지벌에만 깃들어있다고 하랴.
전화의 나날 농업협동화의 휘황한 설계도가 펼쳐진 평원군 원화농장, 반당반혁명종파분자들이 없애버리려던 대지에 재생과 번영의 활력을 부어주신 대홍단벌, 분조관리제가 창조된 철령너머 깊은 산골에 자리잡고있는 회양군 포천농장,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이 태여난 강서구역 청산농장…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우리 나라 농촌들가운데 가보지 않은 곳이 별로 없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 농촌경리부문을 지도하기 위하여 농장들에 찾아다닌것만 하여도 수십만리는 될것이며 농장원들을 만나 담화한것만 하여도 수만명이 될것이라는데 대하여 감회깊이 추억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나라 북변의 농장들과 두메산골의 농촌마을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이 있는 곳이라면 다 찾아가시였다.잘사는 농장은 살림이 늘어가는 모습이 기쁘시여 자주 찾으시고 형편이 어려운 농장은 늘 마음에 걸리시여 오셨던 길 또 오시며 마음쓰신 우리 수령님의 로고와 헌신으로 엮어진 사랑의 서사시는 대를 이어가며 전하고 또 전해도 끝이 없을것이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80고령에도 어느 하루 편히 쉬신적이 없으시였다.
1993년 8월에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농사일이 걱정되시여 황해남도를 찾으시였다.
먼길을 달리신 피로를 푸실 사이도 없이 이른새벽부터 정오가 될무렵까지 여러 군의 5개 농장을 현지지도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점심시간에는 휴식도 뒤로 미루시고 정무원(당시)과 황해남도 책임일군들의 협의회를 가지시였다.
협의회에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황해남도의 농사가 중요하기때문에 어떤 때에는 국가주석을 그만두고 황해남도에 내려와서 농사를 지도하는 고문노릇을 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군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농사를 잘 지어 인민들을 잘살게 하고싶으신 념원이 얼마나 절절하시면 우리 수령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였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 농업생산을 위해 헌신의 자욱을 새기시던 나날 뜨겁게 하신 교시가 오늘도 만사람의 심금을 세차게 울린다.
내가 늘 말하는것이지만 쌀은 곧 사회주의이다.알곡문제를 풀지 않고서는 인민들의 생활을 빨리 높일수 없으며 사회주의를 성과적으로 건설할수 없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이렇듯 숭고한 뜻을 안으시고 한평생 로고와 심혈을 다 바치시였다.
이 나라 포전길에 새겨진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의 자욱자욱, 오곡백과 무르익는 풍요한 가을을 안아오기 위하여 끝없이 헌신하신 수령님의 자애로운 그 모습을 우리 인민은 천만년세월이 흘러도 못잊는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늘도 농장벌에 계시며 사회주의대지의 풍년가을을 축복해주신다.사회주의강국건설의 승리를 알곡증산으로 앞당겨오라고 고무해주신다.
본사기자 림정호